⛰️ 일산에 사는 개발자들

[회고] 회사는 망했지만 워커홀릭이 되어버린 이야기

dorage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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다니던 스타트업이 망했다. 어저께 모든 짐을 챙기고 마지막 점심을 먹고 사무실을 떠나왔다.

나는 일을 엄청나게 싫어했다. 그렇다고 공부를 좋아했던 것도 아니었다. 나는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.

항상 돈 많은 백수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사는 삶이라고 생각했다.

항상 작은 직장을 전전했지만, 일을 못 한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 없었고 그냥 그것에 만족하며 돈 조금 벌면 여행을 가고, 돈이 떨어지면 다시 일하고 이런 삶을 반복했다.

처음 개발자라는 커리어를 시작하기 위해 여러 곳에 지원하고 한 스타트업에 입사하게 되었다. 1 년만 버티자 했었는데 근 6개월에 망할 줄 누가 알았겠나.

1주일 전까지만 하더라도 버티면 이긴다, 결국 여기서 쓰러지면 패배하는 거라고 했었는데… 그리고 1주일 뒤에 회사가 문 닫는다고 할 줄 누가 알았겠나..

대표님의 또 다른 회사에서 기획 직군으로 일을 해보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받았다. 일단은 돈을 벌어야 하니 뭐 나쁘지 않은데 라는 생각은 들었었다. 하지만 여전히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.

그렇게 심란한 상태로 2주 정도를 그냥 허비했던 것 같다. 그런데 그렇게 허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. 생각이 정리된 시점은 정말 우연히 찾아왔다.

직장 동료 분과 일과 후에 피시방을 갔다. 피시방을 가면서 이 시간에 사무실에서 나와 본 게 정말 오랜만이라는 말을 했다. 평일에 롤을 해본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.

게임은 모두 졌지만, 집에 오니 갑자기 모든 생각들이 정리가 되고 후련해졌다. 그리고 내가 가야 할 길이 보이는 것 같았다.

짧은 5개월을 돌이켜 보며, 내가 나를 잘 몰랐던 것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다.

나의 실패도 아니었고, 내가 진 리스크도 없었다. 오히려 나는 이곳에서 팀원들과 이전 직장들에서는 해볼 수 없었던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었다.

기적의 CPC 18원짜리 광고에 놀라기도 하고, 믹스패널과 애널리틱스를 통해 프로덕트를 개선해 나가는 과정이나, 유저 인터뷰, AB테스트 등 그 외에 여러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다.

더 나은 프로덕트를 위해 어떤 것을 해야 할지 찾고, 개선하는 과정들은 모두 너무나도 재미있었다.

반년이라는 기간은 너무나 짧지만, 그 안에서 배웠던 것들은 27년을 살아오면서 가장 재미있었던 기간이었고, 나의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.

이렇게 애정을 쏟았으니 허무감이 몰려오는 것도 맞는 것 같았다. 아직도 애잔하게 마음속에 남아있다.

일을 하면서 힘을 얻을 수 있던 사람이란 말을 들었을 때는 이게 내가 들을 말이 맞나 싶었지만, 스타트업이라는 곳이 나를 그렇게 만드는 것 같다.

어쩌면 나는 일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.

그리고, 내가 근 6개월간 업무에서 쏟은 열정에 ‘나의 일’을 더하면 자영업이 되고, 사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. 내가 잘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보다도 해낼 수 있다,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.

다음 일은 반년이 아닌 내가 즐거울 때까지 계속할 수 있는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.

테스트해보고 싶은 것들이 많이 쌓여있고 계속해서 쌓이고 있다.

다시 한번 즐겨봐야겠다.